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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우디·이란 갈등의 배경
2. 합의의 동인
3. 역내 정치에 미치는 함의
4. 미·중 경쟁 구도에서의 함의
5. 맺음말: 향후 관찰 포인트
중국 베이징에서 3월 10일 발표된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 합의는 중동 역내외 정치지형의 변화를 의미한다. 2016년 단교 이후 7년 만에 양국은 국교 재개를 선언하며 2개월 내 대사관 복원 계획을 밝혔다. 기존 경제, 안보 협정을 복원함으로써 갈등 관계의 종식을 추구하기로 약속했다. 전쟁이나 무력사용이 아닌 외교협상을 통한 관계 정상화에 유엔을 비롯, 한국 등 주요국들의 환영 논평이 잇달았다.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이 합의가 중국의 중재로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중동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중 전략경쟁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1. 사우디·이란 갈등의 배경
⑴ 보수왕정 대 혁명이념의 대결
본래 중동의 갈등선(葛藤線)은 종파주의(sectarianism)와 맞물려왔다. 수니파를 대표하는 사우디와 시아파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이란이 종파 분쟁을 견인했다. 하지만 사우디·이란 갈등을 정체성 차이에서 연원한 분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지역 패권 경쟁에 종파를 도구화하는 양상이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자연스럽게 중동 내에서는 혁명사상 전파를 통해 패권을 획득하려는 이란과, 이를 막으려는 보수 왕정 사우디 중심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란은 혁명 이후 호메이니가 고안한 정치체제를 정통성의 근원으로 제시해왔다. 이란이 구현하는 ‘이슬람 법학자 통치(Velayat-i-faqih)’ 체제야말로 선지자가 유산(遺産)으로 남긴 이슬람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전제 군주 제도는 이슬람이 본질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논지다. 이슬람 혁명의 수출이 이란 체제의 의무라는 점을 강조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파흘라비(Pahlavi) 왕정을 전복시키고 이슬람 공화정을 구현한 이란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혁명 전파를 통한 팽창주의 정책을 국시로 내세우는 데 대한 우려가 컸다. 이란이 혁명을 추구하는 대리세력을 각국에 심고 지원함으로써 역내 왕정들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혁명수비대 해외특수작전 부대(Al Quds brigade)를 통해 역내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기타 이라크 시아파 무장집단과 연계, 역내 불안을 야기했다.
사우디의 또 다른 우려는 자국 내 시아파를 이란이 준동시킬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인구의 10% 내외를 점유하는 사우디 시아파는 대부분 동부 연안 지대에 밀집 거주하고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란과 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스럽게 리야드 왕실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분리주의 혐의로 투옥된 이들도 있었다.
⑵ 단교 전후 정세: 이란핵합의 타결 및 모하메드 빈 살만의 등장
2016년 1월 2일, 사우디 정부는 셰이크 니므르 바크르 알-니므르(Sheikh Nimr Bakr al-Nimr)를 비롯 4명의 자국 시아파 주요 인사를 수니파 테러리스트 43명과 함께 처형했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시아파 이란의 군중들은 분노했다.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과 마슈하드(Mashhad) 소재 총영사관 방화 및 국기탈취가 일어났다. 사우디는 1월 3일 즉각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최근까지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2016년 1월 당시 양국 정세는 어땠을까? 이란핵합의가 극적으로 통과된 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전년 7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은 이란과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을 타결했다. 동년 10월 말을 기해 이란에 대한 삼중 제재(미국, UN, EU)가 모두 해제된 즈음이었다. 이란이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주변국의 이란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던 시기다.
사우디에서는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현 사우디 왕세자가 각료직을 맡으며 권력에 막 접근하던 시기였다. 2015년 압둘라(Abdullah bin Abdulaziz Al Saud) 국왕의 타계 이후 현 살만(Salman bin Abdulaziz Al Saud) 국왕이 등장했다. 왕실 내부는 어수선했다. 차기 왕위 계승자를 놓고 혼돈의 조짐이 보였다. 2015년 4월 무끄린(Muqrin bin Abdulaziz Al Saud) 왕세제(王世弟)의 폐위 및 모하메드 빈 나예프(Mohammed bin Nayef) 왕세질(王世姪)이 등장하면서 3세대 승계구도가 본격화한다. 이 때 모하메드 현 왕세자가 제2 왕위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실질적 미래 권력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그의 주도로 예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란이 부상하고 사우디는 혼돈국면이었던 시기에 시아파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 결집을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이란과의 적대관계를 왕세자가 주도한 측면이 있다. 결국 단교로 이어졌다. 양국관계는 최근까지 악화일로였다.
2. 합의의 동인
금번 합의 성사의 주요 동인은 무엇일까? 양국 리더십의 의중이 핵심이다. 사우디에게는 주도적으로 상황을 안정시키겠다는 적극적인 동기가 있었고, 이란은 이에 응하는 형태의 소극적 동기를 보였다.
⑴ 사우디: 적극적 동인(비전 이행 위한 국내 정세 안정)
먼저 사우디는 국내 안정을 위한 적극적 수순을 택했다. 왕세자의 야심 찬 국가개조프로젝트 ‘비전2030’을 추진하려면 외부 위협부터 선제적으로 제거해야 했다. 위협의 핵심은 이란이다. 특히 예멘 내전 개입 이후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사우디 도발을 지속하면서 위험도가 높아졌다. 2019년 리야드 인근 쿠라이스(Khurais) 유전과 동부해안 최대정유시설 아브카이크(Abqaiq)가 드론에 의해 피격당한 충격이 컸다.
사우디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중동 관여가 축소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바이든(Joe Biden) 행정부가 인권 문제로 왕세자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며 안보 협력에 차질이 생겼다. 사우디는 아예 위협의 본산인 이란과 직접 합의에 나섰다. 7년 전 자신의 주도로 중단했던 이란과의 관계를 왕세자 본인이 다시 복원한 셈이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접근이다. 한때 사우디는 이란 정부를 위험한 나치에 비교하기도 했었다. 이란의 도발 행태에 큰 변화가 없음에도 먼저 적극적으로 합의를 추구한 점이 눈에 띈다. 왕세자의 결정이다. 이는 2015년 권력에 갑자기 서게 되었던 왕세자가 이제 권력 기반을 확고히 했음을 드러냈다.
⑵ 이란: 소극적 동인(경제난 탈피)
이란 입장에서는 정치적 목표인 혁명 수출 노선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실질적 경제이익을 먼저 추구한 셈이다. 2018년 미국의 이란 제재 복원 이후 경제난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석유 수출은 물론 금융거래까지 차단되면서 생활고로 인한 민심 이반도 감지되고 있다. 특히 작년 9월, 22세 여성의 히잡 불량착용 관련 의문사 이후 국내 시위가 확산하였던 터다. 젠더 문제로 불거진 시위는 세대 저항을 거쳐, 소수 민족들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이후 시위는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경제난으로 인한 위협요인은 상존한다. 자칫 계급 시위로 발전하면 체제 위기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서는 핵합의 재개가 시급했다. 바이든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공약대로 이란과의 핵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유럽 3국(영국, 프랑스, 독일)이 적극적 중재 역할을 맡았다. 미국과 이란 모두 협상 타결의 동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치열한 협상이 전개되었다. 한 때 타결 임박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이란이 러시아에 미사일과 드론을 제공하면서 유럽은 이란을 실질적 적국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핵합의 타결 가능성은 급속도로 낮아졌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경제적 지원 여력이 있는 중국과의 연대가 절실했다. 중국의 중재로 이란은 사우디와의 교역을 통해 시급한 경제난을 해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번 합의가 타결되었다.
구체적으로 합의 내역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추론은 가능하다. 이란은 역내 친(親)이란 시아파 무장집단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사우디는 중단되었던 대이란 교역과 투자를 점진적으로 재개할 것이다. 제재 문제가 걸려있긴 하지만 최근 왕세자의 행보를 고려하면 사우디가 워싱턴의 압박을 심각하게 우려할 것 같지는 않다.
3. 역내 정치에 미치는 함의
⑴ 잠정적 안정 시현
본 합의로 인해 중동 최대 지정학적 갈등이 일단 안정 국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비전 2030’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안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네옴시티(Neom City)를 중근동과 유럽 관광의 허브로 만들고 각종 국제 행사의 무대로 변화시키겠다는 계획의 전제는 정세 안정이다. 친이란 무장집단들의 발호가 진정되고, 이란이 효과적으로 이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사우디는 국내 개발 프로젝트를 계획대로 수행할 수 있다. 이는 왕세자의 권력 기반 공고화와 연결된다.
이란은 이웃한 지역 강국 사우디와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외교적 성과를 내세우며 시위 여파로 흔들리는 국민들을 설득할 여지를 마련했다. 실제로 사우디의 적극적 대이란 유화정책이 가시화 되면 경제난 일부 해소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이반된 민심을 일정부분 안정화 시키는 기대까지 가능하다.
다만 각기 국내 정치의 안정화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에는 여전히 갈등요인도 상존한다. 일정 정도 자율성을 가진 친이란 대리세력을 합의대로 제어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렵다. 양국 강경보수주의자들의 적대감, 상호 불신, 그리고 이란 권력 승계 과정에서의 불가측성 등 내부적 불안요인이 적지 않다.
⑵ 내전 지역 관리 시도
일단 내전 지역 분쟁의 빈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시리아와 예멘에서 정치적 합의 타결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사우디는 이번 합의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 교착 국면에 빠진 예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왕세자가 주도한 내전 개입으로 인해 사우디는 21세기 최대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한 당사국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란이 후티 반군에 대한 무기 및 물자 공급을 중단하고 정치 협상에 나가도록 설득한다면 사우디로서는 부담을 더는 셈이다.
시리아 문제 역시 양국이 해결책을 공론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단 그동안 경원해 온 아사드(Bashar al-Assad) 정부에 대한 친화정책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UAE: United Arab Emirates) 방문을 비롯, 인근 아랍 중동 국가들과 공개적 외교 행보를 시작했다.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 정상화 이후 사우디는 아사드 정부를 다시 승인하고 재건 등 협력 요인을 모색할 가능성이 커졌다.
⑶ UAE의 외교 행보 주목
사우디와 이란 간 합의의 간접적, 단기적 수혜자는 UAE가 될 것이다. 오랜 제재로 시스템이 불비한 이란의 대외 교역 창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제 교역 관계가 일정 부분 회복될 경우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는 일정 기간 거래 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두바이 내 이란 커뮤니티의 규모와 네트워크 조밀도를 고려하면 당분간 사우디 역시 두바이의 기초 자산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UAE는 사우디의 대내외정책 전개에 앞서 선도적 행보를 보였다. 이란과의 관계이나, 두바이 엑스포 등 국제 이벤트 유치 등의 사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UAE 대통령과 사우디 왕세자는 국가 운영의 주요 쟁점을 놓고 한 때 긴밀히 상의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UAE의 이란 관계 추이는 사우디의 이란 정책을 전망케 하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UAE는 이란을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전면전을 염두에 둔 강경·적대정책은 상정하지 않는다. 이란발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지키기 위해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외교안보 정책 1순위라면, 그다음 우선순위는 위협의 주체인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안보를 보장한다는 방침이다. 사우디 역시 유사한 정책 행보를 염두에 둘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와 이란이 첨예한 갈등 관계였던 최근 2년간 오만과 이라크가 양국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사우디·이란 외교관계 복원 이후에는 현실적으로 UAE의 중간 역할이 더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⑷ 이스라엘의 고민 심화
금번 합의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국가는 이스라엘이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으로 UAE 등 일군(一群)의 아랍 국가들과 수교한 후 이스라엘의 전략적 심도(strategic depth)는 극적으로 높아졌다. 자국의 군사 행동 반경이 걸프 해역까지 이르게 되었다며 이스라엘 전략가들은 환호했다. 필요시 이란 공습이 용이해졌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최근 사우디와 오만 영공을 이스라엘 민항기가 통과하면서 자신감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금번 합의로 인해 상황은 급변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협정 체결을 기반으로 아랍 국가들과 계속 수교를 추진하고 있다. 그 중 사우디와의 수교가 궁극적 목표였다. 아브라함 협정 구상의 기저에는 반(反)이란 안보협력관계 구상이 있다. 이란을 공통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걸프 왕정 국가들과 연대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중동에서의 전략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정보 및 미국 안보공동체와의 연계망은 중동 국가들에게 긴요한 자산이기에 아브라함 협정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사우디의 대이란 직접 상대 노선으로 인해 상황은 반전되었다. 당분간 이스라엘이 주도하는 이른바 중동판 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 구상 실현은 난망하게 되었다. 여기에 현 네타냐후 이스라엘 연립정부의 극우보수화로 인해 이스라엘 국내 여론도 악화된 상태다. 사법 개악 논란에, 초정통파 보수주의 유대교 각료들의 비합리적 행보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현 보수 연정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내정과 외교 모두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내우외환 상황을 맞았고 이번 합의가 결정타였다. 이번 사태로 네타냐후는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무능과 중동정책 부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내부 문제로 미국의 비판에 노출되어 있던 중에 미·이스라엘 관계 악화징후까지 중첩된 상황이다.
3. 미·중 경쟁 구도에서의 함의
⑴ 중국의 성과: 명분과 실리 획득
양국 간 전격적 합의 타결 소식은 의외였다. 그러나 더 큰 의외성은 시점과 장소 그리고 중재자 중국의 존재감이었다. 중동 내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지역 강국의 외교관계를 정상화시켰다는 것은 중국의 외교 성과임이 틀림없다.
전국인민대표자 회의를 통해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세 번째 임기를 확정하는 시점에 베이징에서 이 합의가 발표되었다. 양국관계 정상화의의 골간은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이었다. 즉 이란이 혁명 사상 수출을 추진하며 사우디 등 인근 국가의 체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중국이 자국의 대외 정책을 시전할 때마다 주장해 온 내용과 일치한다. 작년 4월 시진핑이 보아오 포럼(BFA: Boao Forum for Asia)에서 발표한 글로벌 안보구상(Global Security Initiative)의 요체다.
중국의 경제적 실익도 눈여겨 볼만하다. 두 갈등 국가의 합의를 중재한 상황에서 향후 중국의 중동 인프라 투자와 개발 진출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리스크 요인의 감소 때문이다. 동시에 중동 석유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상태에서 전통적 에너지 강국들과 우호적 관계를 조성한 것 역시 중요한 성과다. 석유와 가스의 안정적 구매가 가능해졌다. 특히 석유가 이동하는 항해로 (sea lanes of communication) 중 가장 첨예한 위험지역인 호르무즈를 안정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계기다. 중국으로서는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는 항로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 모두에게 유익하지만 이 해로가 미국과 민감하게 경쟁하는 항로였기에 이번 합의 중재는 중국에게 더 큰 지정학적 의미를 가진다.
⑵ 미국의 당혹감: 중동 정책 재고 여론
미국은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중동 관여를 줄이고 동아시아에 역점을 기울이며 인도·태평양 전략을 구체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중동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이 지역 관리를 포기하면 중동은 극단주의의 거점이 되고 분쟁이 심화되면서 결국 미국의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바마(Barack Obama) 정부부터 중동에서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역외 균형(offshore balancing)’을 통한 간접 개입을 논의해 온 배경이다.
직접적, 물리적 존재감은 감소시키지만 외교적, 정치적 영향력은 일정 거리에서 유지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세력균형을 구상했다. 중동 내 지역 패권을 다툴만한 역내 강국 간 힘의 균형을 미국이 거중 조정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사우디, 이란, 튀르키예 3개국 간 균형을 통해 지역 안정을 견인하겠다는 판단에 근거했다. 사우디는 견고한 양자관계를 통한 친미 국가로 유지시키고, 튀르키예는 중립 행보를 보이지만 나토를 통한 관리가 가능했고, 핵개발 의지를 갖고 반미 전선에 서 있는 이란만 중립지대로 끌고 올 수 있으면 되었다. 2015년 미국이 주도한 이란 핵합의 타결의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이후 핵합의가 실질적으로 파기되면서 이란과 적대적 관계로 돌아섰다. 이에 미국은 최근에는 아브라함 협정 즉, 친미 아랍·이스라엘 연대를 통해 이란과 러시아 등 현상변경 세력을 압박하는 구도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적극적 역외균형자론(3자 균형 중재)에서 소극적 역외균형자론(친미 진영론)으로 바뀐 모양새였다. 중동판 나토 구상설이 워싱턴 싱크탱크 중심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이는 사우디를 핵심 우방으로 전제한 구상이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와의 관계 악화가 돌발 변수로 떠올랐다.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을 인권과 가치의 문제로 길들이려는 바이든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주요 명분인 인권 문제를 우방국 사우디에게는 예외로 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향후 미·사우디 관계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집권할 사우디 미래 군주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로 왕세자를 압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왕세자는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자신을 길들이려 하는 바이든 정부의 압박을 수용하지 않았다.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가 급등 그리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사우디의 도움이 필요했다. 작년 7월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방문, 원유 증산 등을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 타협에 실패했다. 그리고 금번 사우디·이란 간 합의를 지켜보아야 했다.
워싱턴 내에서는 다시 중동, 특히 사우디를 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인태전략으로 동아시아에 집중했더니 결국 서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권이 조성되고 있다는 우려다. 태평양을 막았더니 중국의 영향력이 이란 벨트, 즉 아프가니스탄-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통해 지중해로 이어질 수 있고, 사우디와 걸프를 함께 아우르며 홍해로도 연결된다는 지정학적 위기감도 일고 있다. 일대일로의 확장판인 셈이다.
결국 미국의 중동 정책 전반에 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무엇보다 중동에서 ‘필수불가결 국가(indispensable nation)’의 지위를 중국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우디와의 협력이 긴요하다는 여론이 워싱턴 조야(朝野)에 다시 부상하고 있다. 향후 대선을 앞두고 본 사안은 주요 외교 의제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⑶ 사우디의 게임: 미국에 대한 역압박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 합의 과정에서 중국이 외교적 성과에 고무되고, 미국이 당혹스럽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중재 노력 및 외교 성과와는 별개로, 사실상 판을 주도한 것은 사우디라고 할 수 있다. 사우디의 의도와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을 활용해서 미국을 압박하는 게임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기조를 타격한 것이라 보인다.
중국은 2년 전부터 미국과 사우디 관계가 악화되는 징후가 드러나자 걸프 지역 외교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본래 사우디는 미국 영향권에 속해있었다. ‘석유와 안보의 교환’ 약속에 의거, 70여년 이어진 양국관계의 틀에 기초했다. 그러나 미국의 중동 이탈,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격 철군이 걸프 왕정에 가져다준 충격이 컸다. 시진핑의 중국은 이 틈을 파고 들었다. 중국은 중동에서 늘 경제적 관여에만 집중해왔다. 정무, 군사적 개입은 가능한 한 회피해 왔다. 시진핑 집권기는 달랐다. 일대일로를 엮으면서 공세적 중동외교를 펼친 것이다. 사우디는 중국을 활용하여 중립지대에서 일종의 비동맹 외교 행보를 펼치고 있다.
사우디는 금번 베이징 합의를 통해 시진핑 외교성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동참했다. 그렇다고 미국과 절연하고 친중 진영에 편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우디는 여전히 미국과 다양한 이익이 결합된 ‘이익공동체’다. 특히 안보의존도가 높다. 단기간 내 미국을 대체할 협력 대상을 찾기 어렵다. 사우디의 경제구조 역시 여전히 미국과의 협력 요인이 많고, 왕세자가 직접 추진하는 비전프로젝트는 미국의 컨설팅 회사들의 조언 없이 수행하기 힘들다.
물론 빈 살만 왕세자는 선대 국왕들처럼 무조건 미국을 추수(追隨)하는 순종적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미국은 석유 최대 구매자가 아니다. 안보를 제공해주고 있지만 사우디의 행태를 문제 삼으며 이전 같은 무조건적 지원을 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즉위를 염두에 두고, 곧 맞게 될 왕국 건국 백주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접근을 구상할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가 외교적 자율성이며, 금번 합의 타결 과정에서 일부 드러낸 것이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의 이익 계산상 사우디에게 미국은 여전히 불가결한 존재다. 미국의 안보 협력 없이는 국가 존속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이 점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금번 합의의 충격파와는 완연히 다른 신호를 미국에 보내고 있다. 베이징 합의의 즈음에, 사우디는 미국에게 민수용 핵개발 지원을 요청하면서, 기술을 이전해 줄 경우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사우디의 아브라함 협정 참여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희구하고 있다. 다른 소식도 있다. 2025년 출범이 계획된 사우디 제2 국영항공사가 보잉사에 350억 달러 규모의 항공기 구매를 거의 확약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우디는 미국과의 협력 요인들을 발굴하며 대미 협력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5. 맺음말: 향후 관찰 포인트
중국은 특정한 지역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곳에서 공세적으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중동, 동남아, 중앙아 등지에서의 적극적 행보가 눈에 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중동에서 보여준 중재 역할의 의미는 크다. 국제사회의 관심사는 중동에서 과거 미국이 수행하던 역외 주요국의 지위를 중국이 대체할 수 있을까에 있다. 경제적 관여까지는 큰 부담 없이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원인의 분쟁이 상시화되고 정치적인 복잡성이 얽혀있는 중동에 군사적 자산 투입 없이 중재국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율성을 가진 친이란 무장세력들이 계속 발호하며 폭력 행위를 지속할 경우 중국이 무력 개입을 시도할 수 있을까? 이 경우 중동의 고질적인 분쟁 당사자로 개입하게 되는 셈이다. 현재로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동 현지 주요국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이 빠져나가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대안으로 급히 부상한 중국과 접촉점을 넓히고 있지만, 과연 중국과의 협력이 장기적인 공동번영을 담보해줄 수 있는지에 관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 사우디·이란 간 극적 화해 합의를 견인한 시진핑 지도부가 집권 3기를 맞아 어떤 중동정책을 펼 것인지, 미국은 사우디 등 역내 기존 우방국들을 어떻게 설득하여 중동 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할 수 있을지 이제부터 그 경합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한국은 지정학적 단층선에 있는 여타 중견국가들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각국이 미·중 경쟁 구도를 어떻게 활용하며 국익 확대 노선을 펼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유사 입장 국가들(like-situated countries)과의 의견 공유 및 협력 요인 탐색에 나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붙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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