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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13년 핵보유국법과의 비교
II. 2020년 러시아 핵 정책 문서와의 유사성
III. 시사점: 교리와 능력의 괴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 9월 8일 평양이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2일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채택했다는 법령의 이름이다(이하 ‘핵무력정책법’). 이튿날 노동신문 1-4 면에 게재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이 법령이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 이후 본격화되어온 핵무기 실전전력화 행보의 연장선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내내 이어진 북측의 관련행보와 조치, 최고지도자 수준에서 나온 언급을 제도화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아예 새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구와 형식, 핵 교리 차원의 전제들은 평양이 최근 구축해가고 있는 핵 실전전력화 교리와 태세가 어떤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한층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8년 북미 협상국면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관영언론은 “경제상황 개선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대외행보”라는 프레임을 반복적으로 활용했다. 제재 해제를 통해 광물자원 수출이나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는 수단으로써 핵 협상을 사고하고 있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러나 최근 평양이 사용하고 있는 논리는 정반대다. “자력갱생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핵무력이 제공하는 (군사적) 안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시정연설에 등장하는 “비핵화는 없다”는 단정적 선언은 그 정점에 해당한다. 2018년에 사용했던 수사의 완전한 폐기 혹은 뒤집기를 대내외적으로 공식화하는 수순이다.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시도 역시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핵무력 관련 정책을 법제화하고 이를 관리, 통제하는 절차를 확립함으로써 국제사회는 인정할리 없는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기정사실화하겠다는 취지다. 여기에는 연이은 북한의 핵전력 강화 행보와 관련해 중국과 러시아 등 전통적 우호 국가들이 한켠에 품고 있을 불안감을 일부나마 줄여보겠다는 의지도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무력정책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무엇보다 핵전력의 용도와 관련 지휘통제 구조를 이전보다 상세히 설명한 조항들이다. 일차적으로는 평양이 추구하고 있는 핵무기 실전전력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동시에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핵무기를 최후의 응징보복용으로 사용한다는 초기의 태도에서 벗어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재래식 교전 와중에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로의 공식적 전환이다. 기실 올해 상반기동안 평양이 내놓은 관련 발언과 행동은 모두 이러한 작업을 위한 준비 조치에 가까웠다. 9월 8일 핵무력정책법의 채택과 공개는 그간의 행보를 일단락 짓는 평양 나름의 세리머니인 셈이다.
I. 2013년 핵보유국법과의 비교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2013년 4월 “자위적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이하 ‘핵보유국법’)”을 채택한 바 있다. 핵무력정책법은 11조 1항을 통해 이 법이 2013년 핵보유국법의 효력을 대체하는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두 법은 확산 방지 노력 등 일부 조항에서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큰 차이가 있는 주요 항목을 대비해보면 9년 5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변화해온 북한의 핵전력 관련 사고방식과 인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총 11개조 2600 여자로 구성된 핵무력정책법은 10개항 1200자 남짓으로 되어있는 2013년 법에 비해 분량이 두 배 이상 늘었고 구성 역시 한층 정교화 됐다. 핵보유국법의 경우 곳곳에서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주체의 사회주의 강국으로 세상에 빛을 뿌리게 되었다” 같은 모호한 개념어가 곳곳에서 눈에 띄는 반면, 핵무력정책법은 훨씬 정교한 용어 사용과 체계적인 구조가 특징적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2013년 법령이 그해 2월의 3차 핵실험 직후 자신들의 행보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올해의 핵무력정책법은 실제로 핵을 어떻게 사용, 관리, 통제할 것인지 구체적인 지침을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통상 핵무장 국가가 자신들의 핵전력과 관련한 방침을 일부나마 공개함으로써 그 억제력과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하는 핵교리 혹은 선언정책(declaratory policy) 문서로 볼 수 있고,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매우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1. 핵무력의 ‘사명’관련 언급
세부 내용에서 두 법의 가장 큰 대비점은 ‘핵무력의 사명’을 다루고 있는 항목으로, 우리 식으로는 핵전력의 용도 혹은 임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법령 2조가 “우리 공화국에 대한 침략과 공격을 억제, 격퇴하고 침략의 본거지들에 대한 섬멸적인 보복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핵무기의 용도를 규정하고 있는 반면, 새 법령 1조는 1항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한다”면서도 2항에서는 “전쟁억제가 실패하는 경우 적대세력의 침략과 공격을 격퇴하고 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작전적 사명을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뜻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두 법령의 규정은 실제로는 서구 강대국 내부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온 논쟁의 핵심을 다루고 있다. 핵무기의 사용 목적과 관련한 두 가지 큰 견해차이다. 냉전 초기 핵무기의 압도적 위력을 절감한 미국과 소련은 이를 기존의 재래식 무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정치적 무기’라고 인식했고, 따라서 상대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상대의 수도 등을 핵으로 응징 혹은 보복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핵사용을 억제하는 최후의 용도(last resort)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전술핵 전력의 개발과 투발수단의 발전이 거듭됨에 따라 핵무기 또한 다른 재래식 무기처럼 전장에서의 우세나 승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일 뿐’이라는 인식, 이른바 핵무기의 실전전력화(war-fighting capability) 경향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주요국의 핵 교리는 이 두 개의 큰 기둥 사이를 오가며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태세를 찾는 방식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2013년 법령의 언급은 전자, 다시 말해 ‘섬멸적 보복’을 위협함으로써 상대의 핵사용을 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이 경우 핵사용은, 그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양측 모두의 공멸을 전제한 위협이었던 셈이다. 반면 올해 법령은 이에 더해 “전쟁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추가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핵무기 또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력으로 만들겠다는 지향점을 밝히고 있다. 핵무기를 사용하고도 생존 혹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새 법령의 핵심적인 목적이 이러한 개연성을 열어두고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새 법령의 이러한 특징은 6조 ‘핵무기의 사용조건’이 규정하고 있는 5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1) 핵무기 또는 기타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2)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3)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적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4)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5) 기타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해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다.
이들 규정은 모두 상대의 공격이 핵공격인지 재래식 공격인지를 구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다른 핵무장 국가의 선언정책에 비해 핵사용 결정의 수위를 크게 낮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재래식 전쟁의 와중에도 자신들은 얼마든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실전전력화 교리의 극단적인 형태다. 더욱이 1~3 항은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포함함으로써 심지어는 재래전 발발 유무와도 상관없이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4항과 5항의 언급은 한층 더 포괄적이어서 사실상 어떤 상황에서든 핵무기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핵사용의 문턱(nuclear threshold)을 최대한 낮추어 언제든 사용이 가능한 위태로운 태세를 유지함으로써 상대의 어떠한 군사행동도 핵무기를 통해 억제하겠다는 취지에 가깝다
재래전의 와중에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상대의 재래식 군사행동조차 어렵게 만들겠다는 계산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0년대 이후의 파키스탄이나 1960년대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경우처럼 ▲잠재적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상대에 비해 재래식 전력이 열세라고 느끼는 국가들은 이렇듯 상대의 재래식 침공을 전술핵 공격으로 격퇴하겠다는 교리를 공통적으로 채택한 바 있기 때문이다. 재래전을 전술핵 사용단계로 빠르게 확전시킬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자신들의 재래식 전력 열세를 상쇄하겠다는 교리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당시 교리나 태세가 모두 상대의 대규모 지상군 침공 같은 상황을 전술핵 사용의 조건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핵무력정책법 관련 규정은 선행사례에 비해서도 핵사용 문턱이 매우 낮고 자의적이다. 극단적인 불확실성을 과시함으로써 억제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공세적 태도다.
2. 핵무력의 지휘통제 관련 언급
이론적으로 볼 때 앞서 살펴본 ‘어떤 상황에서 핵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핵무기를 어떻게 관리,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전의 양면이다. 재래전에서의 선제적 핵 확전을 위협하고자 하는 국가라면 유사시 무기의 실제 사용을 결정, 실행하는 절차가 매우 간단하거나 현장의 지휘관에게 위임돼 있다고 과시할 필요가 생긴다. 반면 핵을 최후보복 용도로 쓰는데 주안점을 두는 국가라면 유사시 핵사용 결정 또한 중앙에서 신중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 옳다. 핵무기의 기술적 완성을 달성한 국가들은 모두 이와 관련한 명령체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른바 핵전력의 지휘통제(nuclear command and control) 이슈다.
2013년 핵보유국법에서 이를 다룬 조항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최종명령에 의하여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한 문장뿐이다. 당시만 해도 이 이슈가 평양에게 별다른 고민거리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반면 새 핵무력정책법은 3조 전체를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에 할애했다. 이제까지 북한 문헌에서 자주 쓰이지 않았던 ‘지휘통제’라는 단어를 명기한 것 자체가 특징적이다. 핵전력의 운용에 관한 최근 평양의 용어 사용이 서구 핵 억제이론의 주요 개념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는 방증 중 하나다.
새 핵무력정책법 3조 1항과 2항은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한다”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우선 핵전력의 최고결정권자 직함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서 국무위원장으로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은 두 직위에 더해 노동당 최고수뇌까지 겸임해왔으므로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군사 직위인 최고사령관 직함 대신 국가 직위인 국무위원장 직함을 사용한 것은 제도적 차원에서는 분명 큰 차이다. 핵전력의 관할권 혹은 결정권이 군사 조직이 아니라 국가 조직임을 공식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시기의 이른바 ‘선군정치’ 유산이 잦아들고 당과 정부의 군에 대한 우위가 명확해진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더불어 2항은 “국무위원장이 임명하는 성원들로 구성된 국가핵무력지휘기구(를 구성해)…국무위원장을 보좌한다”고 규정했다. 핵전력과 관련한 주요 사항의 결정이 중앙에서 엄중하게 이뤄질 것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책임 있는 핵보유국’ 이미지를 위한 규정이다. 다만 이 기구가 인도나 파키스탄의 NCA (National Command Authority)처럼 집단적 논의과정을 포함하는 조직인지, 미국의 NMCC(National Military Command Center)의 경우처럼 핵전력 지휘통제의 물리적 통신체계 정도를 담당하는 조직인지는 법령에서의 언급만으로는 불분명하다.
3항은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체계가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는 경우 사전에 결정된 작전방안에 따라…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1,2 항에서는 중앙집중형(assertive) 지휘통제를 언급하면서도 3항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한 사전위임형(delegative) 지휘통제를 병행적으로 구축할 것이라고 언급한 셈이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구조는 사실 기존의 핵국가, 특히 잠재적국에 비해 핵전력의 상대적 열세를 고민했던 나라들이 역시나 공통적으로 탐색했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상대의 대규모 핵 선제공격으로 통신체계가 파괴되거나 국가지도부가 절멸한 상황에서도 보복 핵공격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과시함으로써 선제공격이나 참수공격을 억제하려는 시도다. 냉전시기 소련과 영국은 적국의 전략핵 공격으로 본토의 국가지휘부가 완전히 절멸한 뒤에도 잠수함은 살아남아 상대에게 핵 공격을 가하는 교리를 택한 바 있다. 발사명령권자가 모두 사라진 뒤에도 핵미사일 단추를 누른다는 의미에서 ‘죽은 손(Dead Hand)’으로 불렸던 프로토콜이다.
이 때문에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1,2항의 언급과 3항의 언급은 실제로는 상충된다고 보기 어렵다. 1,2항의 언급이 모두 중앙집중형 지휘통제라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면, 3항은 그러한 원칙이 야기할 수 있는 참수작전의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탄력적 적용’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냉전 시기 특히 전술핵무기의 발사권한을 현장지휘관에게 사전 위임했던 미국 등의 경우도 대통령 1인에게 핵사용 결정권이 독점돼 있는 원칙 자체는 한 차례도 수정한 적이 없었다. 다만 법적으로는 대통령에게 있는 권한을 현장지휘관에게 ‘탄력적으로 위임’하는 실행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핵무력정책법 3조 3항이 ‘자동적 핵 타격’과 관련해 “사전에 결정된 작전방안에 따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 역시 유사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핵사용 결정권의 국무위원장 독점 원칙은 유지하되, 하부규정 등을 통한 사전 위임이나 자동화 프로토콜의 길을 열어둔 셈이다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평양이 재래전의 와중에도 먼저 전술핵을 사용해 전장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교리를 추구하고 있다면, 평양은 미국의 압도적 핵전력이 부과하는 참수 작전이나 무장해제 타격(disarming strike)의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실제로 북한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핵을 사용할 경우 워싱턴으로서는 북한의 국가지도부 전체를 제거하거나 핵전력 전체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게 될 개연성이 높다. 북측의 ICBM이 미측의 이러한 1차 타격과 미사일방어(MD)를 뚫고 살아남아 미국 본토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상황을 워싱턴이 심각하게 우려한다면 이러한 대응 옵션에 제약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북측 핵전력이 이러한 확증보복능력(assured retaliation capability)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워싱턴이 판단하게 될 개연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북측은 미국의 대규모 핵보복을 저지할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다. 이러한 카드가 없다면 재래전 와중에 먼저 핵무기를 사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가겠다는 평양의 계산은 군사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이른바 ‘자동적 핵 타격’에 대한 언급은 다탄두(MIRV) ICBM 이나 신뢰할만한 SLBM 능력 확보 등을 통해 대미 확증보복능력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어떻게든 미측의 대규모 핵보복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책인 셈이다. 선제적 핵사용 이후에도 지도부 궤멸이나 최고지도자의 참수 같은 극단적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시도다.
앞서 설명한 국가핵무력지휘기구 또한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선행국가의 경우 핵사용 결정의 신뢰성이나 안정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군사조직과는 분리된 정치지도부 차원의 집단적 결정 프로세스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별도의 기구 구성을 강조해왔다. 반면 이 기구가 집단적 논의과정을 포함하는 보좌기구라면, 최고지도자의 절멸이나 통신두절 상황에서도 핵사용 결정이 이뤄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함께 언급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포함한 국가수뇌부에 대한 공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대규모 보복 핵사용의 위험을 야기할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려는 시도다.
이렇게 보면 평양은 향후 국가핵무력지휘기구가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 그 세부내역을 공개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다만 북한의 권력구조와 최근의 당· 정·군 관계를 감안하면 당정치국상무위원회나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이 주요 구성원이 되거나 사실상 동일하게 구성될 공산이 클 것이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평양은 당규약 개정을 통해 이들 위원회의 회의 요건이나 의사정족수 규정을 안건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완화한 바 있다. 역시나 김정은 위원장의 유고 상황에서도 핵사용 결정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권한승계(devolution) 장치로 풀이할 수 있다.
II. 2020년 러시아 핵 정책 문서와의 유사성
시야를 좀더 넓혀보자면, 핵무력정책법의 구조나 문장, 단어의 용법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뚜렷한 특징은 러시아의 공식 핵 정책 문헌과의 유사성이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는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핵 교리 관련 문서를 작성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최근 버전에 해당하는 2020 년 6 월의 대통령 명령 ‘핵 억제 영역의 러시아 국가정책 기본 원칙에 대하여(Об Основах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политик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области ядерного сдерживания, 이하 ‘기본원칙’)’의 경우 평양이 핵무력정책법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참고한 문헌으로 보인다.
전 세계 핵무장 국가를 통틀어 핵사용의 조건이나 지휘통제 등과 관련해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를 공개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압도적 핵전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러시아 정도만이 이러한 공개적 선언정책을 통해 오히려 억제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택해왔을 뿐이고, 더욱이 최근에는 모호성을 더욱 중시하는 기조로 분위기가 바뀌어왔다. 이들에 비해 소규모 전력을 보유한 핵무장국가들, 특히 잠재적국에 비해 핵전력이 열세인 국가들은 최대한 모호한 지침이나 언급을 통해 억제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양의 핵무력정책법은 예외적인 사례다. 이제 막 핵전력 구축의 발걸음을 뗀 국가가 러시아의 공개적 선언정책 방법론을 고스란히 흉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선 각각 법령과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법제화된 문서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분량이나 주요 항목의 구성 역시 상당히 흡사해 형식상의 공통점이 뚜렷하다. 심지어 1 조에 등장하는 "국가주권과 령토완정, 인민의 생명안전을 수호하는 국가방위의 기본력량” 같은 단어들은 러시아의 ‘기본원칙’ 1조 문장을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다
내용상의 공통점도 두드러진다. 2020년 러시아의 ‘기본원칙’은 핵사용 조건을 다룬 3조 19항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a) 탄도미사일 공격이 러시아나 동맹국 영토에 이뤄질 것이라는 신뢰성 있는 정보가 있을 때 b) 적국이 러시아 혹은 동맹국에 대해 핵무기나 다른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했을 때 c) 적국이 러시아의 주요 정부 및 군사시설을 공격해 대응 핵 공격체제를 와해시킨 경우 d) 러시아에 대한 재래식 공격으로 인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경우다. 이에 더해 1조 4항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군사행동이 확전되는 것을 막고 러시아와 동맹국에게 수용 가능한 조건에서 분쟁을 종료할 지침을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2조 15항에서는 핵억제력과 실전전력이라는 두 축의 대비태세를 항구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앞에서 살펴본 핵정책무력법의 주요 내용, 즉 ▲재래전 와중에서의 선제적 핵사용 옵션 과시 ▲핵무기를 억제전력과 실전전력으로 모두 활용한다는 이중 교리 ▲핵사용 문턱 낮추기를 통한 재래식 열세상쇄 등이 모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20년의 ‘기본원칙’ 문서는 러시아가 전장에서의 전술핵 확전 위협을 통해 미국이나 NATO 의 군사행동을 저지하거나 물러서게 만드는 이른바 ‘비확전을 위한 확전(Escalate to De-escalate)’ 교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문서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군사당국과 학계에서 의심하던 해당 교리의 존재가 이 문서를 통해 실증된 셈이었다. ‘비확전을 위한 확전’ 교리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모스크바가 핵사용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암시함으로써 현실화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미국과 NATO 의 직접적 군사개입 자제가 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평양은 러시아측 교리가 효과를 발휘한 결과라고 인식하고 관련 교리와 선언정책의 적극적 공개를 서둘렀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사한 상황을 한반도에서도 연출해 미측의 확장억제 가동과 전시증원을 저지하겠다는 것이 핵무력정책법의 근본 목적인 셈이다.
III. 시사점: 교리와 능력의 괴리
이러한 목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물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모두 필요하다. 전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저위력의 핵무기, 즉 전술핵무기가 전자라면, 교리와 선언정책, 지휘통제와 준비태세 구축은 후자다. 2021년 초 이후 평양은 두 축의 준비를 빠른 속도로 완성하기 위해 연쇄 미사일발사 등을 거듭했고, 전술핵 탄두 개발을 위한 7차 핵실험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국내외적 여건으로 인해 7차 핵실험 단행이 하염없이 미뤄지면서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준비조치에서 먼저 속도를 내온 것이 2022년 상반기 평양의 행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핵 실전전력화 방침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전술핵 장착을 처음 명시한 신형전술유도무기를 공개하는 한편, 이를 종합하는 취지에서 핵무력정책법을 채택, 공개하게 된 일련의 과정이다.
따지고 보면 2013년 핵보유국법과 이번 핵무력정책법에 담긴 평양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이 큰 폭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핵전력과 투발수단의 다양화로 인해 평양으로서는 이를 한층 정교하고 세련되게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절감해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하드웨어의 역량 강화에 따른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 한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평양이 참조하고 있는 선행사례 혹은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 러시아라는 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확전을 위한 확전’은 러시아가 미국과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수준의 대등한 핵전력을 보유한 국가이기 때문에 상정할 수 있는 교리다. 확전의 끝에는 결국 공멸뿐이므로 미국 역시 러시아측의 확전 위협을 심각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다. 반면 앞서 설명했듯 북측의 대미 타격능력에 대한 미측의 인식은 확증보복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북측이 러시아를 따라 선제핵사용을 위협한다 해도 미측이 이 때문에 확장억제 가동 등에서 제약을 느낄 공산은 크지 않다. 평양이 무엇을 추구하든, 최소한 워싱턴의 인식은 이에 훨씬 가깝다.
추구하는 교리와 실제 능력 사이의 괴리, 혹은 평양의 인식과 실제 현실 사이의 이러한 괴리로 인해, 북측은 자신들이 선제적으로 핵을 사용한 이후에도 미측의 대규모 핵사용 응징을 피할 수 있는 ‘기묘한 구조의 상호 핵 억제’를 만들어낼 묘안이 없을지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중이다. 앞서 살펴본 극단적인 핵사용 조건 낮추기와 자의성 과시, 위임된 혹은 자동화된 보복 핵사용 위협은 모두 이를 위한 고육지책에 해당한다. 문제는 그러한 평양의 시도가 우발적 핵사용의 위험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북 혹은 북미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자칫 평양의 무모한 핵 실전전력 사용으로 이어질 경우 그 다음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핵 참화가 될 확률이 충분하다. 평양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안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북측의 정책결정권자들이 이 차가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 당사국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 붙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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