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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동성명 행간 읽기
2.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과 판단
3. 향후 전망: 평양의 계산
기묘하다. 5월 31일 평양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9일 앞서 열린 한미정상회담과 관련한 첫 번째 반응을 내놓았다. 그러나 1200자 남짓의 이 길지 않은 글은, ‘국제문제평론가 김명철’이라는 필자의 직함 – 책임 있는 당국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듯한 – 은 차치하더라도 사실상 오로지 미사일지침 종료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기 짝이 없다. 공동성명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는 북핵 협상 관련 부분은 짐짓 보지 못한 것처럼 4월 말 윤곽이 공개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스치듯이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5월 2일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의 담화가 하루 전 대북정책 검토 종료를 알린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의 설명은 제쳐두고 4월 29일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연설 내용만을 거론했던 것과 같은 패턴이다.
북측으로서는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대목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평양이 핵 협상과 관련해 최근 취해온 유보적인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관련한 한·미측의 메시지나 행보에 대한 반응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북측의 이러한 ‘무언급’은 역설적으로 이번 정상회담의 북핵 문제 관련 논의가 담고 있는 특징을 거울처럼 비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단기적인 행동방안 도출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원칙의 마련이라는 정상회담 공동선언의 기조다.
1. 공동성명 행간 읽기
이 대목에서 이번 정상회담의 북핵문제 논의가 추구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조속한 남북·북미 협상 재개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핵심이었는지, △아니면 향후 수년 사이 – 바이든 행정부 임기 동안 – 북핵문제를 다뤄나가는 기본원칙에 대해 양측의 공감대를 정리하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북핵 문제 관련 부분은 명확히 후자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을 알 수 있다. 빠른 시일 안에 협상 테이블 복원을 위해 노력한다는 언급 대신, 앞으로 이러한 원칙과 방향성으로 협상을 추진해 나간다는 총론 혹은 거시적인 규칙 설정(rule setting)의 문장이 주를 이룬다.
주지하다시피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은 크게 △대화와 제재의 병행유지라는 기본원칙 재확인 암시,△외교적·평화적 접근법의 절대적 중요성과 군사적 접근법의 배격, △2018년 주요 합의와의 연속성 인정 혹은 존중,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실용적·단계적 접근법의 채택, △한국측의 남북관계 관여·협력 공간에 대한 미측의 인정과 함께 긴밀한 한미공조 원칙 강조, △인권 문제와 인도적 지원 문제의 동시 언급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공동성명의 이러한 특징은 단기적 혹은 중기적으로 이번 정상회담 합의가 남북·북미관계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평양이 내놓은 첫 반응의 기묘한 태도는 이번 회담 결과만을 보고 북측이 대화의 조건 혹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할 개연성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를 목적으로 마련된 공동성명이 아님을 북한 당국자들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시간 범위를 좀 더 넓혀보면 공동성명이 담고 있는 여러 원칙은 향후 한미 양국의 북핵문제 대응이 견지하게 될 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바이든 행정부 임기 4년 동안에는 이러한 원칙이 유지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핵·ICBM 실험 같은 평양의 고강도 추가도발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최소한의 안전판 마련에 초점을 맞췄다는 의미다.
한국측으로서는 조속한 북미 협상 테이블 복원을 위해 정상회담 테이블을 활용하는 방안 역시 충분히 고민할만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2018년 9월 평양선언과 2019년 하노이 회담에서 제기된 영변 모델을 발전시켜 영변+알파로 만들고, 이에 대한 미국측의 공감대를 회담을 통해 이끌어 내는 방식을 최대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대신 정상회담의 논의가 원칙 마련의 방향으로 귀결된 것은 일차적으로 양국 정상간 논의라는 형식을 감안할 때 단기적 돌파구 마련보다는 중기적 원칙 정립이 더욱 적합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라고 풀이할 수 있다.
2.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과 판단
그러나 이와 동시에 미국측의 판단이나 인식이 아직 이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미측이 검토를 마친 대북정책 – 정교하고 실용적인 접근법 – 은 전임 정부들과는 차별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협상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는 점이 두드러질 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대신 이번 북핵 문제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집중도가 우리의 기대와 사뭇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신호를 통해 확인된다. 코로나와 경기 침체, 인종 문제와 같은 국내문제는 물론, 미중 경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란과의 핵 협상 복원 같은 여타 국제 문제가 첨예하게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측의 상황을 감안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핵물질 생산 동결 같은 최소한의 물리적 성과를 도출하는 것 못지않게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 정상회담의 위상과 성격에 더욱 부합한다는 판단의 배경을 읽을 수 있다.
거칠게 말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혹은 북핵 협상 방향은 구조적으로 ‘구체적 성과를 위한 실용적 접근’이라는 현실론과 ‘인권과 가치’라는 원칙론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자를 중시하는 그룹과 후자를 중시하는 그룹 가운데 어느 쪽이 집행과정에서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가가 주요 변수라고 도식화 할 수 있다. 대선 기간 바이든 캠프 내에는 양측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나름의 구분선을 그려낸바 있으나,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이후 주요 관련 포스트의 인사에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탁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에 대한 비판 혹은 반성 차원에서 가치외교를 전면에 내걸었고, 3월 한미2+2회담을 전후해서는 북핵 문제에서도 인권 문제를 포함한 원칙론적 태도가 두드러졌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측의 적극적인 조율이 이어지면서 이러한 기류에는 일정부분 변화가 생겼고 그 결과물이 4월 말 검토를 마친 대북정책 패키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대북 정책이 영변 모델 혹은 영변+알파 모델을 활용해 최대한 빠른 시기 안에 핵물질 동결 등의 구체적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단기적 실용주의를 고스란히 적용한 개념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 이유다.
대신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에는 외교정책의 균형과 동맹국에 대한 배려를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난다. 판문점·싱가포르 합의 등 트럼프 행정부 시기의 협상에 대한 포용적 언급이나 ‘한반도 비핵화’ 용어 사용, 인권 등의 근본문제가 공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역내 주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어느 쪽도 반대하기 쉽지 않은 중간지점을 포착하고 북한 역시 대놓고 반발하기 쉽지 않은 위치를 찾아내는 이러한 방식은 앞으로도 미측의 북핵정책이 특정방향으로 강하게 경도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본 3월 전후의 미측 분위기를 감안하면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이러한 원칙 혹은 기조의 공개 확인을 이끌어낸 것 역시 상당한 성공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3. 향후 전망: 평양의 계산
5월 31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의 기묘한 태도는, 이렇듯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총론 차원의 규칙 설정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미국측이 제안 혹은 수용할 수 있는 초기 비핵화 조치 – 상응조치의 교환식(formula)같은 내용이 담겼다면 북측의 반응 역시 한층 직접적이고 명확했을 공산이 크다. 주지하다시피 2019년 하노이 회담의 실패 이후 평양은 협상교착의 장기화를 단거리·전술핵 전력 강화의 계기로 활용해왔고, 미·중 갈등의 방향이 명확히 가닥이 잡힐 때까지 관망하며 버틴다는 자세로 사실상 상황을 ‘관리’해왔다. 북측이 앞으로도 당분간 소극적 자세를 취할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반면 초기 조치를 시작점으로 하는 단계적 접근 방식이 하노이 당시부터 평양이 선호했던 그림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3월을 전후해 미국측의 인권 중시 언급을 예의주시했던 평양으로서는 중간 균형점을 중시한 바이든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내심 안도했을 수 있고, 미측이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는 한 북측으로서는 ICBM 발사와 같은 전략도발에 나설 공간이 크게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면 북측의 버티기 전략이 내부의 여러 역량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내기를 앞둔 4월 무렵 거론되던 국경봉쇄 부분완화가 기약 없이 미뤄지면서 비료 등 농업자재의 수입중단으로 인해 김정은 체제가 국내 경제 상황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은 노동신문 등 관영언론 보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감지될 정도다.
다만 앞서 살펴본 미측의 실용적인 접근방식이 인권 문제나 대테러비협력국 지정 등 다른 이슈와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될지는 구분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북핵 협상과 이들 근본 이슈를 같은 테이블에서 다루지 않겠다는 것에 가까울 뿐, 이들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거나 유보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란 JCPOA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이슈는 다른 정책수단을 통해 다뤄나갈 것이고, 따라서 해당 이슈로 인한 대북제재는 핵 협상이 타결되는 경우에도 유지될 것이라는 태도를 취할 공산이 더 커 보이는 이유다. 향후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이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은 단계적 협상을 선호하면서도 미측이 인권 등의 근본 이슈를 언급할 때마다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비난할 공산이 크고, 워싱턴은 두 사안을 분리해 접근할 것이라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양측은 문재인-바이든 행정부 사이의 북핵 정책조율 첫 번째 라운드를 끝마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마련된 원칙과 공감대를 기반으로 이제부터는 협상 재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 행보를 기획·추진하는 다음 단계 정책조율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여건 악화를 실감하고 있는 북한의 정책결정그룹은 아마도 이러한 논의에 훨씬 더 관심이 클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평양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협상 테이블에 나와 마주앉는 것이라는 점이다.
* 붙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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