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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2. 등거리외교의 정의와 특성
3. 중소 이념분쟁 시기 북한의 외교
4. 중소 안보갈등 시기 북한의 등거리외교
5. 북한의 자주노선과 등거리외교
6. 북한외교에 대한 현재적 함의와 고려사항
<요약>
미중갈등이 장기화․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미중갈등에 대한 북한의 외교적 선택을 전망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이전 북한 외교의 유사 사례를 검토할 필요성이 있으며, 대표적 사례가 냉전 시기 중소분쟁 사례이다.
이에 따라 이 글의 목적은 냉전 시기 중소분쟁 사례와 탈냉전 시기 북한이 대미관계를 일정 정도 개선했던 사례를 검토하여 북한외교의 특징을 분석하고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미중갈등 시기 북한 외교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한국의 고려사항을 제시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등거리외교가 성립하려면 먼저 대립하는 두 국가가 존재해야 하며, 그 두 국가 사이에 각각의 국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국가에서 상호 이익의 균형과 충돌이 발생하는 삼각관계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등거리외교란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각 나라에 같은 비중을 두면서 대립하는 두 국가 사이에서 사안과 조건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어느 한 편을 지지하나 다른 한 편의 입장에 절대적 반대를 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를 지칭한다.
등거리 외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첫째, 구성국인 세 국가 중 등거리외교의 주도권을 가지는 주도국과 그 대상이 되는 두 개의 대상국으로 구분된다. 둘째, 대상국인 두 국가의 관계는 일반적인 삼각관계에서 보이는 이해관계에 있어서의 협력보다는 견제와 대립의 요소가 지배적이어야 한다. 셋째, 주어진 삼각관계에서 등거리외교의 주도국은 대상국인 두 국가보다 더 큰 이익을 획득할 수 있으며, 주도국이 약소국이어도 가능하다. 넷째, 대상국인 두 국가가 대립을 완화하고 관계가 개선되어 협력의 요소가 많아지면 등거리외교의 실효성은 사라진다.
중소분쟁에서 중국과 소련이 대립적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이익이 충돌하는 조건이 마련되었으며, 중소간의 대립 상황에서 북한은 등거리외교의 주도국으로서 이익 추구를 위해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고 분석된다. 이러한 중소분쟁 시기 북한의 등거리외교 추구는 미중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시기에 북한이 미중 양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의 역사적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미국과 우호관계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중소 사이의 등거리외교를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북한이 등거리외교를 추구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일정 정도 이뤄져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은 북한이 미국과 일정 정도 관계를 개선한 상황에서 미중 사이의 북한 외교에 대한 시사점을 이끌어낼 것이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Khrushchev)에 의한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 제창과 스탈린(Stalin) 격하는 중소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소분쟁 초기 중소간의 대립이 심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중소 양국으로부터 안보 및 경제 지원이 필요했던 북한은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안보 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북한은 중소 양국과의 경제 및 안보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소분쟁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후 1960년 소련은 중국에 자국 고문단과 전문가들의 귀국조치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1960년 후반부터 모든 교류를 단절하여 중국에 대한 경제 및 안보 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대중국 관계 강화는 대소 관계의 약화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경제 및 안보지원을 받는 한편 소련으로부터의 안보지원 확보를 위해서도 노력하는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 북한은 이 시기 소련과의 관계도 강화시켰는데 이는 중국이 보유하지 못하였으나 소련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및 과학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1년 북한은 중소 양국과 모두 안보조항을 포함한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모두로부터 안보 지원을 확보하고 중소 양국이 충돌할 경우 북한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였다.
1962년부터 중소 양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어느 한 편을 지지하도록 주문하였고, 여기에서 북한이 주목한 것은 중소 양국의 다른 국가에 대한 민족해방 운동 지원 여부였기 때문에 북한은 중국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1962년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의 쿠바에서의 미사일 철수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대한 소련의 중립 입장은 북한에게 소련에 의한 안전보장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1962년 11월 북한 군사대표단이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북한의 소련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이 시기에 중국에 편향된 입장을 보였으나 중국의 안보 능력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1962년부터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수립하고 그 실천을 위해 국방 분야에서 '4대 군사노선’을 추진하여 군사력 향상의 내적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도 병행하였다.
중소분쟁이 이념적 갈등에서 시작하였으나 안보 갈등으로 확대된 원인이 소련의 핵을 비롯한 안보 관련 기술 이전 중단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밀착되었던 북한이 중국 편향에서 다시 등거리외교를 회복한 원인 역시 중국의 핵기술 이전 거부에 있었다. 1964년 10월 중국은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하였으나, 중국이 북한에 핵기술 공유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중국 편향 외교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에 북한은 1964년 10월 들어선 소련 코시긴 수상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면서 1965년 2월 코시긴 수상의 방북을 성사시키면서 소련으로부터의 경제 및 안보지원도 확보하는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 북한의 중소 간 등거리외교가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이 시기로서,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국경조약의 이익을 챙기고, 새로 등장한 소련 정권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였다.
이후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시작된 상황에서 중국은 베트남 전쟁 발발 이전 식민지에 대한 전쟁은 혁명운동을 적극 지원함으로써만 ‘중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 베트남전쟁에서 미제국주의와의 충돌을 회피하는 중국의 태도는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의 민족해방운동 지원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또한 당시 북한의 베트남 지원에 대해 중국과 갈등이 발생하였고 북한은 1966년 7월경 폴란드 군사특사가 북한을 방문한 이후 30명의 조종사와 10대의 미그 21(MIG-21) 전투기 등을 북베트남에 보냈고, 물자 지원도 지속하였다. 북한은 1966년 8월 「로동신문」의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사설을 통해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를 모두 반대하는 자주노선을 선언하였고, 중국과 소련 양국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등거리 노선을 추구하였다. 1966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중소 양국과 거리를 두는 외교노선을 공식화하여 중소 양국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국내적으로 안보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1968년 10월 중국은 문화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을 발표하고 대외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969년 북중 국경지역에서 실제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면서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북한은 중소 양국 모두를 비판하는 자주외교를 심화하는 한편, 자국 안보력 강화를 추구하여 안보에서의 자주노선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중소분쟁 시기 북한의 등거리외교의 특징에 대한 현재적 함의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등거리외교는 갈등 관계에 있는 두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 성립하기 때문에 미중관계가 협력적일 경우 북한의 등거리외교는 성립할 수 없다. 탈냉전 직후 미중관계가 협력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은 미중 사이의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지 못하였다. 둘째, 북한은 강대국 갈등 시 중소 간 등거리외교 경험을 통해 국가 이익의 극대화 전략과 수단을 활용할 것이다. 북한은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이 갈등을 활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적극화할 것이다. 셋째, 북한은 중국으로의 의존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할 것이다. 북한이 중소분쟁에서 이념적으로 중국을 지지하였고 중국 편향의 외교를 보인 시기도 있었으나 중국으로의 일방적 의존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소련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등거리외교를 추구하였다. 탈냉전 직후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북미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바 있으며, 실제로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본 우리의 고려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중-북의 삼각구조 속에서 북한 문제가 논의되지 않도록 한국의 개입을 적극화해야 한다. 미중갈등이 본격화하고 있는 시점에 북한은 미중 양자 구조 속에서 북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은 핵을 비롯한 자국 안보 문제를 미중 양국 사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한국을 배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중-북의 삼각구조 속에서 북한 문제가 논의되지 않도록 한국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둘째, 북미관계 개선과정에서 북한의 미중 간 등거리외교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북한은 안보를 위해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이것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미중 갈등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북한은 미중 갈등을 활용하여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이익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대미관계 개선 과정에서 북한은 미중 간 등거리외교를 통해 중국이나 미국의 어느 한 국가에 편향되지 않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미중 간 북한의 등거리외교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
셋째, 북미관계 개선 이후 북한의 한국 배제 노력에 대비하여야 한다. 북한은 일정 정도 대미관계 개선을 이룬 이후에는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과 한국을 배제하고 자주외교를 추구할 것이다. 실제로 1994년 제네바합의 이후 4자회담 시기와 2007년 2․13합의 이후 북한은 중국을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북미관계가 일정 정도 개선된 이후 북한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배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갈 필요성이 있다.
* 붙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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