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 http://opendata.mofa.go.kr/mofapub/resource/Publication/11193 ) at Linked Data

Property Value
rdf:type
rdfs:label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skos:prefLabel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skos:altLabel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현지정책03-1)
mofadocu:relatedCountry
bibo:abstract
  • 정책연구시리즈 2003-1 
    미·일 군사동맹과 한반도 안보
    안보통일연구부장  장 동 철
    外 交 安 保 硏 究 院
    <요  약>
      1945년 8월 원폭이 투하되자 일본은 동년 7월 미·영·중국간에 합의된 포츠담 선언에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못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연합국(실제적으로는 미국)의 군사점령통치를 받게 되었다.  초기 미국의 대일정책은 일본이 다시는 세계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무장해제와 비군사화를 이룩하는 것으로써 이를 일본에게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무력소유 금지와 전쟁포기조항”이 포함된 소위 평화헌법의 제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대일 안보정책은 국제 공산주의세력의 확대와 더불어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대 수정이 가해졌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주일미군이 급파되면서 일본내에서의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후에 자위대로 변신함)가 급히 발족되고, 연합국의 양보 아래 일본과의 평화조약(강화조약) 조기 체결이 추진되었다. 한국전쟁을 소련의 세계적화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야욕으로 간주한 미국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과 함께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당시미·일 안보조약의 핵심내용은 미군의 일본 주둔과 기지사용이었으며 미국의 일본 방위에 대한 의무는 포함되지 않은 일종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엔 안보리와 총회에서 결의가 채택되자 유엔군에 의한 일본내 기지사용 문제와 일본측의 서비스 제공 문제가 대두되어 1951년 9월 요시다 수상과 애치슨 국무장관간에 유엔군에 대한 일본의 기지와 서비스 제공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후 1954년 2월에 “주일 유엔군에 관한 지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유엔 회원국의 군대가 유엔의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경우 유엔군측에 기지와 서비스를 지원하도록 정치적, 법적 약속을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재무장이 미국의 지원아래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고, 1953년 7월 한반도 휴전협정이 성립되자 일본에 주둔중이었던 유엔군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내에서는 미·일 안보조약의 일방성과 일부 내정간섭적인 불평등 조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됨에 따라 조약 개정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미국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에 대한 안보를 보장해주는 대신 일본은 미국에게 기지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신안보조약을 1960년 1월 체결하였다.  주일 미군기지의 핵심은 오키나와 기지였으며 동 기지는 그후 1972년 일본에게 반환되었으나 미국은 아직도 오키나와에 상당수의 미군기지와 1개 해병사단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 8월 걸프전 발발은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견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이루었으며 1992년 일본은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기 위해 PKO법을 제정하여 캄보디아, 동티모르에 수백 명 규모의 자위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붕괴에 따른 공산주의의 몰락과 동·서간의 긴장완화는 미·일간 안보동맹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96년 4월 하시모토 총리와 클린턴 대통령간의 “21세기를 향한 동맹”이라는 미·일 안전보장공동선언이 발표되어 양국간 동맹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미·일 안보조약의 유효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미국의 억지력이 일본의 안정보장에 있어 계속 기초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안보공동선언에 대한 후속조치로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어 미군에 대한 일본의 물품과 용역지원의 의무를 명문화하였으며, 일본은 주변사태법을 제정하여 일본 주변지역에서 사태가 발생시 일본이 취할 조치에 대한 필요사항을 국내법으로 정하였다.  동법의 실질적인 목적은 후방지역에서의 미군지원 이외에 한반도에서 유사시 일본 교민보호와 수송, 그리고 대량 난민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9․11 테러사건은 미·일간 안보협력과 동맹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강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부시 행정부 출범후 중국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고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정책을 추구하던 상황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대아프간전 및 특히 이라크전에 자위대를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신뢰를 얻고 미국과의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국방비 지출국가로서 자위대를 점진적으로 과학화, 첨단화시켰으며, 미국의 대테러전 참여를 통해 자위 또는 방위개념을 전세계적으로 확대시키고, 기존의 “전수방위” 개념을 실질적으로 수정하면서 군사력의 장거리해외투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주일미군은 1945년부터 3년간 남한에서의 미군정 실시 및 한국전쟁 참여를 통해 한반도 안보문제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으며, 현재 주일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직접 투입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안보에 있어 후방기지와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반도 안보에 있어서 일본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일본내 미군기지 특히 오키나와 기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키나와 기지는 한반도 안보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세계적인 대테러전 수행에 있어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동·아태전략의 중심은 미·일 관계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앞으로 미국의 동아·태전략의 변화와 미·일 군사동맹의 성격의 변화 추세를 면밀히 주시하고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반응도 주시하면서 한반도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한·미·일간의 전략적 안보대화체제 추진과 함께 동북아 다자안보대화를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mofadocu:category
  • Foreign Affaris and National Security Research
  • 정책연구시리즈
mofa:relatedPerson
mofadocu:relatedArea
mofa:relatedEvent
mofa:yearOfData
  • "2003"^^xsd:integer
mofapub:dataURL
  • "https://www.ifans.go.kr/knda/ifans/kor/pblct/PblctView.do?clCode=P03&pblctDtaSn=11193&koreanEngSe=KOR"^^xsd:anyURI
  • "https://www.ifans.go.kr/knda/ifans/kor/pblct/PblctView.do?csrfPreventionSalt=null&pblctDtaSn=11193&menuCl=P03&clCode=P03&koreanEngSe=KOR"^^xsd:anyURI
mofapub:hasAuthor
  • 장동철
mofapub:pubDate
  • "20031127"^^xsd:integer
dcterms:language
  • KOR

본 페이지는 온톨로지 데이터를 Linked Data로 발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