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신추세와 한중관계의 발전 방향 ( http://opendata.mofa.go.kr/mofapub/resource/Publication/11075 ) at Linked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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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신추세와 한중관계의 발전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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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신추세와 한중관계의 발전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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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약 
    
    
    
    중공 「15全大會」를 통해 중국의 지도체제가 마오쩌둥(毛澤東) 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에 한계성을 갖는 덩샤오핑(鄧小平) 체제의 연속적 성격에서 탈피함에 따라 중국은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 수립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던 마오쩌둥 유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마오(毛) 유산의 잔재로 볼 수 있는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보다 근원적으로 청산·조정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이것은 또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정치·안보관계까지 포함하는 전방위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해 가는데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해 갈 것이다. 
    
    
    「15全大會」이후 중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대미관계 개선정책과 그 성과는 중·러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강화와 더불어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조정에 유리한 환경요인으로 나타나고 있고, 특히 미·중 양국이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불안과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통일보다는 평화와 안정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향에서 정책공조를 이룩해 가는 경우,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정책조정이나 선택의 여지는 더욱 확대되어갈 것이다. 
    
    
    그런데 한·중관계의 확대발전이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일정한 영향력 확보나 안정된 관계의 유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2000년 5월 29일 김정일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급진전되고 있는 중·북한 관계의 정상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정일의 중국방문은 곧 중·북한간 정상외교의 회복을 의미하며, 앞으로 양국관계를 전면적으로 복원시키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김정일의 방중을 계기로 양국 정상교류의 전면 회복이 이루어지는 경우, 한·중수교와 김일성 사망으로 단절되거나 작동되지 못했던 다양한 협력채널들이 복구됨으로써 주요 현안에 대한 양국간 정책조율이 가능해 질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협력적 동반자 관계 구축을 통해 상호관계의 영역을 정치·안보 영역까지 포함하는 전면적 영역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정상외교의 회복과 다양한 협력 채널을 확립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나 한반도 평화공존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지금까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과 한반도 문제의 해결 방향에 있어서 한국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한반도 평화공존 체제의 구축과정에서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중 양국이 상호 공동이익을 극대화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이고 順기능적인 역할을 확보해 가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공식 채널외에 보다 효율적인 비공식 채널의 구축을 비롯, 보다 다차원적인 협력 채널을 모색해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한반도 문제해결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 태도와 적극성을 고취시키고 확보해 가는데 있어서 가장 관건적인 것은 바로 북한체제의 변화에 있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 해결의 관건으로서의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위한 조건을 확립해 가는데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지난 5월말 김정일의 중국방문은 북한의 정책노선 변화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5월 북경 방문에서 이루어졌던 중국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김정일의 초보적·원론적 긍정평가가 중국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북한 시각의 공식화로 연결되고, 이러한 새로운 평가가 노선상의 평가로 발전해 가는 경우, 이러한 사태발전은 북한 개혁개방에 대한 중국의 역할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과의 협력이 가능해 지고 있는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중국이 북한의 개혁개방으로의 정책전환에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하도록 유도해 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 평화공존 체제의 구축과정에서 가장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과 영향력을 갖는 국가는 역시 중국이다. 특히 중국은 지금까지 한국의 대북 포용 정책과 한반도문제의 해결방향에 있어서 우리와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해결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그 만큼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중국의 순기능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구해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문제 해결과정에 대한 중국의 순기능을 확보하고 한·중간 협력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손상을 끼치지 않으면서, 중국과의 실질적 관계를 확대해 가는 정책을 적극 모색해 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한·중 동반자관계의 위상을 확립하고 한·미간 공조의 틀을 탈냉전적 상황에 적응하는 방향에서 재확립해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국 외교정책에 있어서 한·미 동맹관계와 한·중 동반자관계에 대한 분명한 위상을 확립하고, 이러한 위상에 대한 한·미 양국의 신뢰가 구축되는 경우, 한·미 동맹관계와 한·중 동반자관계의 상호관계는 Non-Zero Sum 관계로 발전해 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이 확대되고 중국의 순기능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정부의 대중 협력관계가 심화되면서 한·미간에 초래될 수 있는 불신이나 오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미 동맹관계와 한·중 동반자관계가 갖는 기본성격에 대해 미국측이 신뢰를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미간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방향에서 새로운 공조 틀을 마련함으로써 한·중관계 등 과거 적대국들과의 협력이 한·미 동맹관계에서 보다 합리적·기능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구축해 가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한·중간 협력의 공간을 확보해 가야 할 것이다.
    
    
    서 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정세의 유동성이 증대되면서, 지난 90年代이래 동북아에 있어서 유일한 힘의 공백상태로 유지되어 온 북한에 대한 주변 4강의 정책이 크게 변화되고 있다. 이것은 급변하는 한반도에서 그들의 지위와 영향력 상실을 방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적극정책과 한반도 주변국들에 위상을 강화하려는 북한의 전략적 고려가 상호 교차된 결과라 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정책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우선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김정일 총비서가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김정일의 중국방문은 92년 한.중수교와 김일성 사망으로 단절되었던 중.북한간 정상외교의 회복을 의미함과 동시에, 양국관계가 한.중수교 이전의 상태로 복원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북한에 대한 중국의 정책이 '脫이념.脫진영'을 기조로 하는 [獨立自主的 原則]에 따라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양국관계의 복원이 한.중수교 이전의 상태로의 기계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러한 북.중관계의 정상화는 앞으로 남.북한에 대한 중국의 균형정책 추진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줄 것이다. 중국은 지금 남.북한에 대한 균형정책을 통해 한반도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을 모색하고 영향력을 구축해 가려는 정책을 추구해 왔다.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정치.안보 영역으로까지 확장해 가는 전면적 동반자관계로 발전시켜 가면서, 김정일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북한과의 상호관계를 완전 정상화시키고 한.중수교로 붕괴되었던 다양한 협력채널들을 복구함으로써 북한과의 주요 현안에 대한 정책조율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 역할 수행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했으며, 이를 기초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정책도 과거의 우회적.소극적 태도에서 점차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앞으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의 구축과정에 가장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과 영향력을 갖는 국가로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은 지금까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과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향에 있어서 한국정부와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해결에 있어 중국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그 만큼 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본 연구는 최근에 와서 보이고 있는 중국의 對한반도 정책의 새로운 추세와 특징들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향후 우리의 장기적 對中政策 개발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순기능을 확보해 가는 방향을 모색하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우선 중국이 對한반도 정책을 조정하게 된 원인을 중국 지도체제의 개편과, 이에 따라 나타난 정책결정과정의 변화과정에 대한 분석과 탈냉전 이후 중국이 당면한 주변 안보환경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규명한다. 여기서는 남한과의 관계를 전면적 동반자 관계로 확대.발전시키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전면적 관계복원과 상호 관계의 성격 변화과정을 관찰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들의 역할에 대한 태도나 정책변화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들을 기초로 앞으로 한.중관계의 발전영역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한반도 문제해결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과 정책방향을 모색하기로 한다.
    
    
    Ⅰ. 중국의 對한반도정책 조정의 원인
    
    
    1. 대내정치적 요인 
    
    
    
    ⑴ 장쩌민(江澤民) 지도체제의 공고화 
    
    
    
    1997년 9월 중국공산당 [15全大會]에서 장쩌민과 그의 잠재적 경쟁자간의 권력배분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최소화, 대타협을 이룩하고 중국 지도체제에 있어서 장(江)의 핵심적 지위가 공고화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지도체제 내부의 권력배분을 둘러싼 당내 세력간 상호경쟁과 대립을 조정.완충시키는 균형자 역할을 해온 등소평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을 정상(頂上)으로 하는 새로운 권력중심의 확립에 성공함으로써 중국 지도체제가 안정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덩샤오핑(鄧小平) 집권이후, 후야오방.쟈오즈양(胡耀邦.趙紫陽) 체제로부터 장쩌민 체제로 연결되어온 중국 지도체제는 기본적으로 政治局 常務委員會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상호 분업적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어왔고, 주 1) 권력의 과도한 집중현상을 막기 위해 확립된 집단지도체제는 1970년대 말 鄧小平복권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중국지도체제의 기본형식을 이루어 왔다. 특히 1992년과 1993년 사이에 확립된 제2기 江澤民체제하에서는 最高政策決定機關인 政治局 常務委의 구성원 7인의 相互分業的 역할과 권한이 제도화됨으로써 集團指導體制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 졌다. 권력의 과도한 집중현상의 폐단에 대한 鄧小平의 기본관점에 관해서는 鄧小平, "黨和國家領導制度的改革", {鄧小平文選}(香港: 三聯書店, 1983), pp. 287-292 참조. 吳安家, "中共十四大,修改黨章的政治意涵", {中國大陸硏究}(臺北), 第36卷 第1期(1993年 1月), p. 12. 이러한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각 세력간의 조정과 균형을 위한 실질적인 권력중심은 덩샤오핑이 장악해 왔었다. 그런데 덩샤오핑을 실질적인 균형자로 하여 이루어져온 장쩌민 중심의 상호 분업적 집단지도체제가 鄧사후에도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중국 지도체제상의 불안요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도체제내의 균형자로서의 덩샤오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중심의 건립이 절실했으며, 1992년 [14全大會]이후 중국 권력구조내에 있어서 장쩌민의 정치적 지위와 권력을 강화해 온 것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권력중심의 확립과도 긴밀히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주 2) 박두복, "鄧小平사후 중국국내정세전망과 우리의 대응", {정책연구 시리즈 94-9} (외교안보연구원 1995), pp. 15-16. 
    
    
    중공 [15全大會]는 덩샤오핑의 사망으로 1992년의 [14全大會]에서와는 달리 장쩌민과 그의 잠재적 경쟁자간의 권력 재분배를 둘러싼 상호경쟁과 대립을 조정.완충시키는 균형자의 소실에 따라 당내세력간의 대립과 충돌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컸다고 볼 수 있다. 주 3) 박두복, "鄧小平사후시대 중국정치전망", 외교안보연구원, {주요국제문제분석} (1997. 3. 5), pp. 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15全大會]에서 이러한 권력배분을 둘러싼 당내갈등의 표출을 최소화, 타협을 이끌어 내면서 江의 핵심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鄧사후 등장한 중국 사회분위기나 흐름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즉 鄧사망으로 야기된 중국지도층 내부의 위기의식과 그 共有는 지도층 내부의 결속을 위한 응집력으로 작용하였고, 이것은 곧 권력배분을 위한 대립 갈등을 극소화하고 장쩌민의 권력중심을 건립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15全大會]에서는 193명의 위원과 151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中央委員會와 115명으로 구성된 中央紀律檢査委員會가 구성되었으며, 특히 193명의 중앙위원 중 56.5%인 109명이 새로 진출한 신진이며, 군 출신과 지방출신은 14대 중앙위원회와 비슷한 41명(20%)과 61명(31%)으로 나타났다. 중앙위의 평균연령은 56세였으며, 55세 이하가 46%를 점했다. 주 4) 『人民日報』(北京) 1997年 9月 19日. 또한 1997년 9월 19일에 시작된 중공 15期 1中全會에서 이루어진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개편결과, 챠오스(喬石) 전인대상무위원장과 류화칭(劉華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탈락되고, 웨이잰싱(尉健行)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와 리란칭(李嵐淸) 부총리가 새로운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특히 챠오스派의 핵심인 웨이잰싱의 발탁은 챠오스의 퇴진을 위한 타협의 결과이면서, 주 5) 이번 政治局 개편과 관련 江集團과 喬石간의 타협가능성 문제에 관해서는 丁望, 앞의 글, p.10 참조. 동시에 [15全大會]이후 江체제가 강화해갈 사회주의 법제화와 공산당 내부의 기율과 감독기능, 부정부패 척결 등과 관련, 기능강화가 요구되는 중앙기율검사위의 위상제고를 위한 조치로도 볼 수 있다. 리펑(李鵬)이 장쩌민을 권력중심으로 구축해 가는데 적극적인 지원세력으로 편입된 이후 장쩌민의 핵심적 지위에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으로 나타났고 특히 江을 중심으로 한 권력집중에 불만을 가져 온 챠오스의 퇴진은 중국 지도체제내의 균형자로서 江의 역할과 입지를 확대해 가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지도체제내에서의 장쩌민의 핵심적 지위의 확립과 더불어 朱鎔基.胡錦濤.吳邦國.黃菊.曾慶紅.徐匡迪.周子玉 등 親장쩌민 勢力들이 중앙위와 중앙정치국 정치국상무위 등 중국의 권력핵심에 대거 진출함으로써 중국 권력구조에 있어서 江의 기반은 크게 공고화되었다. 주 6) 『星島日報』(香港) 1997年 9月 16日. 
    
    
    
    ⑵ 마오쩌둥(毛澤東) 유산으로부터의 해방 
    
    
    
    [15全大會]에서 이루어진 지도체제 개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과거 [長征]과 [抗日戰爭]을 이끌었던 [革命戰爭型] 제1 2세대가 완전퇴진하고, 지도체제의 주체가 [계획경제] 시대에 배출된 기술관료형 엘리트인 제3세대로 완전히 이전되는 진정한 세대교체가 완성됨으로써 '제3세대 기술관료집단'에 의한 독립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주 7) 張濤, "十五大以後從中國誰主浮沈", {信報財經月報}(香港), 總245期(1997年 9月), pp. 26-30 참조. 따라서 이러한 지도체제의 개편으로 중국의 지도체제는 마오쩌둥과 같은 세대를 이루면서 毛체제와 신체제의 접촉점을 형성했던 덩샤오핑 체제의 연속적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마오쩌둥 체제와 덩샤오핑 체제간의 교체가 같은 세대간의 교체였다면 덩샤오핑 체제와 장쩌민 체제간의 교체는 서로 다른 두 세대간의 교체를 의미한다. 주 8)  張濤, 위의 논문, p. 26. 따라서 [15全大會] 이후 확립된 江체제는 新.舊 두 체제의 접촉점을 형성했던 덩샤오핑 체제의 과도기적 성격에서 탈피, 과거 마오쩌둥 유산이나 굴레로부터 보다 자유스러워짐으로써, 발전과 변혁을 위한 확대된 행동반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5全大會]를 통해 40-50대의 제4세대 간부가 대거 진출했다. [15全大會]에 참석한 2074명의 대표 중 55세 이하가 63.5%를 점했는데, 주 9) 『香港經濟日報』1997年 9月 13日. 이것은 40대에서 50대 초반의 연령구조를 보이고 있는 제4세대 간부가 중국사회의 새로운 중추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 10) 중국 엘리뜨의 세대별 정치성향에 관해서는 박두복, 앞의 "鄧小平사후 중국국내 정세전망과 우리의 대응", pp. 24-26 참조. 특히 이들 제4세대가 중앙위원회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 등 중앙의 권력핵심 진입은 물론 省레벨의 지방권력구조에 있어서도 주도적 위치를 장악해 갈 수 있게 됨에 따라, [15全大會]에서 개편된 江체제는 사실상 제3.4세대의 결합형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江체제의 정책노선과 방향의 결정은 이들 제4세대의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주 11) 제4세대의 진출상황에 대해서는 丁望, {北京跨世紀接班人}(香港: 當代名家出版社 1997), 참조. 특히 [15全大會]이후 [16全大會]에 이르는 5년간은 완전한 독자성을 갖는 명실상부한 장쩌민 시대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제4세대에 의한 정치적 승계과정이 시작되는 시기로 나타났다. 주 12) 『信報』(香港) 1997年 9月 17日. 이에 따라 제4세대로의 정치적 승계과정이 더욱 구체화되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주 13) 『明報』(香港) 1997年 9月 15日. 
    
    
    특히 2000년 8월과 10월에 개최된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와 중공 15기 5中全會의 주요 의제 중에서 국내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안은 2002년에 예정되어 있는 중공 [16全大會] 소집과 관련된 준비작업과 그에 따른 차세대 후계체제의 정비였다. 주 14) 박두복, {2001년 국제정세전망}(외교안보연구원, 2001), p. 27. 
    
    
    최고 영도체제의 개편과정에서 후진타오 국가 부주석을 대표로 한 제4세대가 전면 부상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향후 중국의 후계집단은 문화혁명 이후에 배출된 41-56세의 연령분포를 띠는 제4세대를 중심으로, 제3세대 중기(항일전쟁 전기인 1937-40년 사이에 출생한 60세 전후 연령분포) 세대와 제3세대 후기(최근 중앙레벨에서 부부장급이나 지방레벨에서 성위원회 서기나 부서기로 대거 발탁되고 있는 57-59세의 연령분포) 세대들이 포함될 것이며, 이러한 후계집단은 [광의의 제4세대]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후계집단으로서의 [광의의 제4세대] 대표주자는 후진타오 국가 부주석이 될 것이며, 이 중 제3세대 중기에 해당하고 잠재적 지도역량과 정치기반을 확립해온 청칭홍, 우이(吳儀), 황쥐(黃菊), 쟈칭린(賈慶林) 등이 향후 중국 지도체제의 핵심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주 15) Li Cheng, "Jiang Zemin's Successors: The Rise of the Fourth Generation of Leader's in the PRC," The China Quarterly, no. 161(March 2000), pp. 1-40. 
    
    
    이러한 지도체제의 개편에 따라 중공 중앙위원회 구성원의 평균연령이 [15全大會]와 비교, 적어도 5세 이하 낮아질 것이고, 중앙정치국 구성원의 평균연령도 60세 전후를 형성할 것이며, 정치국 상무원원회의 최대 연령 상한도 70세를 초과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주 16) Ibid.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위한 관건적 시기에 직면한 중국은 중앙과 지방 공히 간부 연경화(年輕化) 정책을 대폭적으로 실시해갈 것이며, 이에 따라 중공 정권수립 이전에 배양된 간부들은 물론 문화혁명 이전에 배출된 간부들이 전면적으로 퇴진되고, 문화혁명 이후에 배출된 신진 간부들이 중요 직책에 대거 등용되어 갈 것이다. 주 17) Ibid. 그 결과 중국 지도체제에 있어서 주류세력은 제3세대로부터 제4세대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세대 후계체제의 확립문제가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대두됨에 따라, 간부의 발탁 등용 문제는 중국 공산당의 집권 지위와 수준을 제고하고 공고히 할 뿐 아니라, 그 동안 추진해온 개혁노선의 실현과도 중요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세대교체와 문화혁명 이후 배출된 신진간부들의 전면 진출을 위한 간부 인사제도 개혁은 더욱 본격화해 갈 것으로 전망된다. 
    
    
    
    ⑶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軍部의 영향력 감소 
    
    
    
    그 동안 군에 대한 당의 지배, 문민통제·軍 任免權 행사 등 군에 대한 장쩌민의 영향력 구축을 위한 노력과 제도화의 성과가 [15全大會] 이후 중국 지도체제의 개편과정에서 확인됨으로써, 장쩌민의 군에 대한 핵심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우선 정치국 상무위원이면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었던 류화칭(劉華淸)을 상무위원에서 퇴진시켰는데, 이것은 군에 대한 장쩌민의 영향력 구축을 위해 軍 원로이며 영향력을 갖는 劉를 발탁했던 덩샤오핑의 정치적 고려가 기본적으로 성취됨으로써 류화칭의 역사적 사명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 18) {빈果日報}(香港), 1997年 9月 16日. 특히 류화칭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퇴진이후, 그 공백을 장완녠(張萬年) 등 軍지도자로 대체하지 않고 리란칭(李嵐淸) 부총리를 발탁한 것은 경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해 가려는 江체제의 의지와 동시에 軍 통치에 대한 장쩌민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 중앙위원회에 임명된 軍 간부 41명 중, 70%가 신임인데, 이것은 중앙군사위 주석으로서 갖는 軍 임면권을 통해 보다 젊은 군 간부를 대폭 발탁, 軍에 대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립해온 일련의 조치의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장쩌민이 [15全大會]의 [政治報告]를 통해 천명된 중국군의 50만 감축 결정도 장쩌민에 대한 군부의 적극적인 지지와 군에 대한 江의 핵심적 지위의 확립과도 긴밀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주 19) {文匯報}(香港), 1997年 9月 14日. 아울러 군에 대한 장쩌민의 영향력 구축을 위한 제도화가 가시적 성과를 거둠에 따라 지금까지 군부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해졌던 조치들도 점차 조정되었으며, 주 20) {빈果日報}, 1997年 9月 13日. 특히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 회의참석 등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군의 참여공간을 확대해 온 기존의 조치들도 수정되어 갔다. 
    
    
    
    ⑷ 덩샤오핑(鄧小平) 이론의 확립과 덩(鄧) 이론의 한계성 극복 
    
    
    
    [15全大會]에서 당장(黨章) 수정을 통해 덩샤오핑 이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동일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확립되었다. 주 21) 江澤民, "高擧鄧小平理論偉大旗幟, 把建設有中國特色社會主義事業全面推向二十一世紀", 中國共産黨 15全大會 「政治報告」, 『新華月報』(北京), 1997年 10月, pp. 11-12.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공식적으로 중국사회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 마오쩌둥과 동격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그 동안 중국사회는 문화혁명과 소련.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해 마오쩌둥 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상실함에 따라 심각한 이념적 진공상태를 초래해 왔고, 그 동안 중국사회에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적극 고취되었던 것도 이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덩샤오핑 이론은 바로 이러한 중국인들의 이념적 진공상태를 메우는 새로운 정신적.이념적 지주로 확립된 것이다. 주 22) 덩(鄧) 이론의 확립과정에 관해서는 朴斗福, 앞의 {鄧小平 사후 중국 국내정세전망과 우리의 대응}, pp. 18-20 참조. 
    
    
    장쩌민은 [政治報告]를 통해 "鄧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중국의 실천과 시대적 특징과 결합된 이론"으로 정의하고, "鄧이론 외에 사회주의 장래와 운명을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고 강조함으로써 鄧이론을 중국 개혁개방과 사회주의현대화 정책의 기본지침임을 강조하였다. 주 23) 앞의 {政治報告}, p.11. 
    
    
    장쩌민은 1997년 5월 29일 中共 中央黨校에서 행한 연설(이하 [5.29 講話]로 약칭)과 15全大會 [政治報告]에서 "鄧小平이론이 과거의 사상적 굴레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단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思想解放과 實事求是를 견지했기 때문이며, 思想解放과 實事求是야말로 1977년 鄧小平의 복권이후 확립된 새로운 사상노선과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이론의 精髓"라고 강조한 바 있다. 주 24) 江澤民, "在中央黨校省部級幹部進修班畢業典禮上的講話",『新華月報』1997年 7期, p.6 및 앞의 {政治報告} p.11. 
    
    
    이와 같이 장쩌민 체제가 鄧이론을 중국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확립하고 鄧이론의 思想解放과 實事求是정신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지금 그들의 합법성 구축을 위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사회주의시장경제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기존의 소유제에 대한 관념이나 틀로부터의 발상의 전환이 불가피해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新 舊 두 체제의 접촉점으로서 과도기적 성격을 띠었던 덩샤오핑 체제는 이러한 사회주의 소유제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서 보다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공간에 한계가 있었다. 주 25) 박두복, 앞의 "鄧小平사후 중국국내 정세전망과 우리의 대응", pp.28-30 참조. 따라서 江 集團이 鄧이론을 중국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확립하고 특히 鄧이론의 '思想解放과 實事求是'정신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전면적 시장화 개혁을 위해 절실한 '신사고'를 제약하는 鄧이론의 한계성을 鄧이론과 鄧의 권위를 통해 극복함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는 개혁노선의 추진에 보다 넓은 행동반경을 확보해 갈려는 정책의지로 볼 수 있다. 
    
    
    한편 장쩌민은 덩샤오핑 이론을 중국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확립한 이후 자신이 강조해 온 지도노선을 마오쩌둥의 혁명사상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및 현대화 이론에 이는 새로운 당 지도노선으로 격상시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화하려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2000년 2월 쟝쩌민은 광동성(廣東省) 순방에서 중국 공산당이 사회생산 발전, 문화발전, 인민대중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삼개대표(三個代表)'론을 제기, 당 간부들은 이 사상에 기초해 지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 26)  {人民日報}, 2000年 2月 12日. 이는 바로 후계체제에 대한 江의 영향력과 특수한 위상을 확립해 가려는 정책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분석된다. 즉 강력한 후계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江은 장쩌민 체제 확립 초기 덩샤오핑이 했던 것처럼 후계체제의 막후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江이후의 장쩌민 노선을 지속해가기 위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 자신의 이념체제를 확립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삼개대표'를 중심으로 한 장쩌민 이론이 확립되어 중공 [16전대회'에서 채택할 당장(黨章)에 중국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규정되는 경우,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사에 있어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이론의 합법적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앞으로 중국 공산당내에서의 장쩌민의 역사적 지위는 물론 중공 정권의 정치노선이나 권력의 연속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중공 16전대회와 10기 전인대(全人大)를 계기로 장쩌민이 당 총서기직과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나더라도 중공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계속 유지, 후계체제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확립함으로써, 제3세대로부터 제4세대로의 안정된 권력이양과정에 있어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해갈 가능성이 크다. 
    
    
    당.정.군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장쩌민은 2002년 중공 [16전대회]를 계기로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가게 될 경우 형식상으로는 장쩌민 시대의 종결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상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江 집단은 후계체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구축, 과거 덩샤오핑의 경우와 같은 특수한 위상과 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해 갈 것으로 전망된다. 주 27) Li Cheng, op. cit. 
    
    
    
    ⑸ 중국 국내정치의 新특징과 對한반도 정책의 조정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고취 등 그 동안 덩샤오핑 이후의 장쩌민 체제의 공고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왔던 국내 정치여건은 중국의 적극적인 대외정책 추진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중국 新지도체제의 확립과 공고화는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 추진을 위한 국내정치적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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