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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과 국제관계 - 한반도 통일을 위한 사례 연구 -
저 자 명 : 서병철
날 짜 : 1998.02
요약
1. 머리말
독일 통일이 예상 밖으로 일찍이, 그리고 놀랄 만큼 신속하게 이루어 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그렇게 되기 위한 충분한 원인이 있었다.
우선, 중․동유럽에서의 자유화 물결과 고르바초프가 채택하여 광범위하게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당시 정책 결정자들의 인적 구성이 탁월했고, 양자 및 다자 문제에 관한 외교를 추진하는 능력 면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통일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정확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한 독일의 거대한 관료 체제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연방 정부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반을 편성하여 동독 관리들과 외교, 법률, 기구 및 재정 등 분야별로 긴밀히 협조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40여년 동안 전혀 다른 체제 속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요인이 짧은 기간 안에 융화되어질 수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의 유럽 및 국제 정치적 구도를 분석하고, 독일이 국제 환경을 어떻게 통일에 유리하게 조성하였나 하는 것을 연구함으로써 통일을 앞둔 한국 외교에 필요한 교훈을 얻고자 함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독일의 경우 2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를 얻어야만 통일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한국은 어느 나라에게도 통일에 관하여 문의하고 동의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일이 더욱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한국은 다만 통일 달성을 위하여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주변 4국이 통일에 반대하고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어려움을 극복한 통일 과정에서 독일 외교를 심층 분석하여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국내외 환경과 독일의 정책
독일 통일 과정에 있어서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이 브란트의 「독일 정책」과 「동방 정책」에 의하여 보완되어 결국에 가서는 통일을 가능케 하였다. 사민당 출신의 슈미트 총리와 기민당 출신의 콜 총리뿐만 아니라 연립 내각에 참여한 자민당 출신의 셸, 겐셔 두 외무장관의 대외정책도 통일을 달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비스마르크가 1971년 통일을 이룩하였던 때와는 달리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의 통일 과정에서는 '鐵血'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또한 19세기와 20세기 두 번에 걸친 독일 통일간에 더욱 의미 있는 차이점은 1990년의 경우 1871년과는 달리 주변 국가들의 의지에 반대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인 지지까지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평화를 정리한 베르사이유 회담에서와는 달리 1990년 두 번째 통일에서는 2차 대전의 승자나 패자가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당사국인 서독이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이를 구체적으로 통일 과정에서 이용하는데 성공하였다.
통일 과정의 초기 단계에 동독에서 발생한 대규모 군중 시위가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의 퇴각을 유발하였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독일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걷혔다. 그 이후 독일내 난민 홍수가 사회 혼란을 야기할 정도로 불어났다. 1989년 11월 한달 만에 13만3천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탈하였는데, 이와 같은 주민의 대이동이 동독 사회․경제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서독에도 위협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 서독 총리는 1989년 11월 28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0개 항목을 제시하였다. 이 계획은 독일 통일이 EU, OSCE 및 동․서간 군비축소 회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작 독일 통일 문제는 여러 과정의 마지막 결과로써 해결될 것이라고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두 독일 구가가 유럽의 다자 협력 체제에 긴밀히 흡수되고, 두 독일 국가간의 지속적인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콜 총리는 서방측 동맹국들과 소련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그 밖에도 이 계획은 동독사회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어 국민들이 고향에 머물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조기 통일을 생각하는 강도가 동독 국민들의 시위에서 높게 표출되었고, 양 독일 정부로 하여금 2개 국가 개념을 급히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동독 정권의 급속한 붕괴, 동독 젊은 층의 대규모 이탈, 이에 뒤따른 동독 국민들의 통일 요구 시위 확산 등 1989년과 1990년에 걸쳐 발생한 사건들은 그 때까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능성으로 막연히 존재하던 통일 문제에 대해 새롭고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소련 통치 체제가 들어서 냉전이 종식된 상황은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를 신속하고 생산적으로 이용한 결과가 통일로 나타났다.
3. 주변 강국의 정책
독일에서 통일로 이어질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자 미국은 2차 대전 후 유럽의 정치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서독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창달하는데 기여한 바 있는 세계 최대 강국으로서의 입장에서 확실한 지지 반응을 보였다. 미국은 과거에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영국, 프랑스 등 이웃 국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독일 통일을 주시하였다. 미국은 독일 통일과 관련해 통일된 독일이 NATO의 회원국으로 잔류하고, 유럽의 안정이 저해되지 않도록 독일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2차 대전 후 확정된 유럽의 국경선이 그대로 유지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소련으로서는 독일의 통일 움직임은 전후 외교정책에 최대의 도전이었다. 소련이 차지하고 있던 유럽, 특히 독일에서의 위치가 새로운 질서 형성에 따라 축소되어야 하는 현실을 감수해야 하며, 또한 과감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정치․경제면에서의 협조 문제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자 소련은 기존의 2개 독일 국가 원칙을 신속하게 수정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이 헬싱키 유럽안보협력회의 원칙에 따라 추진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통일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4대 전승국 권리를 내세워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오타와 「2+4」회담에서 순조롭게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서부터는 독일의 자주 통일 원칙을 제한 없이 지지하는 방향 전환을 하였다.
4. 통일에 대한 기본 문제
냉전 체제가 끝난 후에도 국방의 민주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군사 동맹체가 필요하며, 특히 통일된 독일을 묶어 둘 기구가 요망된다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1․2차 세계대전간의 기간에서와 같이 독일이 어떠한 군사 동맹 속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또한 새롭게 민주화 과정을 걷게 된 중․동유럽의 前사회주의 국가들은 유럽의 현상유지를 미국이 책임질 것과 독일의 군사적 잠재력을 동맹체 안에 흡수해 두기를 희망하고 있어 이들 국가의 안보적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NATO내 잔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독 정부는 통일된 독일이 계속해서 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하고, 모든 외교 역량을 동원하여 노력한다는 기본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초 소련은 동독 지역으로부터 소련군이 철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1989년 12월 브뤼셀에서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통일 문제 자체에 暗影을 던졌다. 소련이 통일 독일의 NATO회원 잔류 원칙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냉전 체제가 종결된 후 NATO의 국제 질서 유지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독일 병력의 수가 어느 정도가 적정 선이고, 또 그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새롭게 정리되었다. 코카서스에서 개최된 고르바초프와 콜간의 마지막 담판에서 두 정상은 통일 후 독일 병력을 3만7천명으로 제한한다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핵 및 생화학 무기의 생산․소유․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측은 일찍부터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소련과 다른 서방측 동맹국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동독과 소련은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경제면에서 가장 긴밀한 협력국이었기 때문에 동독이 독립 국가로서 소멸되는 일은 소련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독일은 소련이 흡족해 할만큼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여 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양국간에 체결된 가장 기본적인 우호 협력 조약 외에도 경제 협력 심화를 목적으로 하는 조약, 소련군 주둔 및 철수에 관한 협정, 경제 협력 및 재정 지원 규정을 이행하는 협정 등이 계속해서 체결되었다.
1989년부터 새롭게 형성된 독일 통일 분위기와 중․동유럽 공산 체제의 붕괴는 새로운 정치 환경을 조성하였고, 자연히 냉전 체제의 산물인 독일․폴란드간의 국경선 문제가 정치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독일이 통일된 직후 1990년 11월 14일 독일과 폴란드는 현존 국경선을 변화없이 인정하는 내용의 국경선에 관한 조약을 재차 체결하였다.
5. 통일 독일의 외교정책
통일 독일은 유럽 중시 안보 정책을 추구한다. 유럽연합이 통일되기 전 독일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며, 동시에 바탕이었던 상황은 통일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유럽의 중심이 된 독일은 유럽연합 통합에 합류하여 독자성을 포기함으로써 신뢰성을 굳히고, OSCE와 WEU를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그리고 수정된 형태의 NATO에 계속해서 회원으로 머물고, 그 핵심 국가 역할을 한다. 독일 외교 정책의 최대 목표는 통일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합의 사항과 협정 등을 정확하게 준수하는데 있다.
통일 독일은 유럽 밖의 분쟁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정책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유럽 밖의 제3국 분쟁 해결에도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냉전 체제 종식후 독일군이 NATO나 OSCE의 제3지역 분쟁 해소 조치에 참여하더라도 그 역할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며, 2차 대전후 반세기 가까이 경과하는 동안 독일은 민주주의, 자유, 사회적 정의, 경제적 번영으로 제3국에 그 인식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통일 독일은 세계의 지도적인 무역․금융 국가로서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 의존 체제가 위협을 받으면,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 인구 증가 및 환경 문제 등 국제적 협력을 촉진하는 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독일의 외교정책 과제는 국제적으로 협력하는데 있다. 한편 분쟁 지역에 휩쓸리는 일은 금세기에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경험에서 금기와 같이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통일된 독일은 과거의 관습에서 점차 벗어나 적극적인 입장에서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방해자를 응징하는 공동 조치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6. 맺는 말
독일과 한국은 역사, 지정학적 입지, 국력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독일 통일 방법은 한반도와는 무관하며, 교훈을 전수할 수도 없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패전국으로써 한반도의 경우보다 더욱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던 독일이 통일된 것은 아무리 유리하지 않은 상황도 노력하면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과 한국은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갖게 한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최초로 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대독일 정책, 특히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은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하였으며, 여기서 우리는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이 40년에서 50년대에 이르는 동안 독일 통일을 회의적으로 생각했으며, 서독이 친서방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그후 60년대까지는 1955년 체결된 독일 조약 규정에 맞게 형식적으로만 지지하는(lip service) 태도를 보였다. 70년대와 80년대 상반기까지도 미․소 두 초강대국의 정책을 대변하는 두 독일이 상호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양 진영간의 데탕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독일이 통일되기보다는 분단된 상태(status quo)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6월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씨 문을 여시오,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촉구하면서부터 미국의 정책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독일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표명되었다. 이어 부시 대통령에 와서는 독일 문제가 국제화하고, 미․독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독일은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 독립 국가의 자결권 인정이라는 미국의 기본 원칙에 따라 통일을 추진하는데 전폭적인 도움을 획득하였다. 독일이 유럽에서 미국의 가장 믿을 만한 우방이라는 신뢰를 얻으려 노력하여 성공함으로써 통일을 앞장서서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동․서독이 먼저 합의하고, 차후에 4개국이 동의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4대 전승국 외의 국가들이 독일 통일 문제에 간섭하고 영향력 발판을 확보하려 시도하였을 때, 독일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주변 국가들이 영향력 행사를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은 이를 결단성 있게 거부해야 한다.
독일은 사전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통일 기회가 오자 이를 신속히 포착하였고, 강력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통일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국도 앞으로 갑자기 올지도 모르는 통일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 따라서 그 기회가 왔을 때, 충분한 경제력과 이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통일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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